안경수 An Gyungsu – 가는 길 on the way

01-Glow-of-factory,-180x230cm,-acrylic-on-Canvas,-2015

2015. 5. 11 Mon – 31 Sun

Opening
2015. 5. 11 Mon 12:00pm ~ 9:00pm

Open
11:00am – 8:00pm (25 Mon 12:00pm – 8:00pm)

MMMG 이태원
MILLIMETER MILLIGRAM B2 hall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 240
MMMG Hall (140-892)
240 MMMG Hall, Itaewon-ro, Yongsan-gu, Seoul, Korea 140-892
Tel. +82.2.549.1520

www.angyungs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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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그 사이

해 저무는 들녘 밤과 낮 그 사이로

하늘은 하늘따라 펼쳐 널리고

이만치 떨어져 바라볼 그 사이로

바람은 갈대잎을 살 불어가는데

이리로 또 저리로 비켜가는 그 사이에

열릴 듯 스쳐가는 그 사이따라 (김민기, 그 사이 中)

안경수 작가는 많이 보여주고 많이 얘기한다. 오가며 찍은 사진, 예전 도록, 작업 중인 그림, 완성작, 더불어 작가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작품이 변화해 온 추이, 회화에 대하여, 계획하는 미래……그래서 많이 보고 또 들었는데, 그러다가 어느 순간이 오면 그는 홀연 멈춘다. 말문을 닫는다. 목표물을 향해 사위를 같이 좁혀가고 있다고 믿다 혼자 남는 모양새처럼 느껴지게 말이다. 놀던 친구가 그만 돌아가 버린 놀이다. 작가는 말을 많이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라며 단호해진다. 이게 모순인데 반복되다보니 짐작컨대 그가 어디서 그만 할래요 하는지 이제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그가 보여주고 말하다 멈춘 그 사이를 더듬어 본다. 그와 나 사이라고 쓰지만, 좁혀는 너와 나 사이. 작가와 기획자 또는 정체모를 글 쓰는 사람 사이. 그가 그리는 밤과 낮 사이. 풍경과 나 사이. 혹은 너른 풍경 속의 풍경과 풍경 사이를 궁리한다.

나는 이제 그가 그리는 그 무엇에 대해 궁금하지 않다. 집, 벽, 돌, 풀은 주위에 흔하다. 흔한 것을 흔하지 않게 그리기도 그림이다. 집이네요. 벽이 새롭게 보이네요. 돌이 낯섭니다. 오랜만에 풀을 보는군요. 그림이 발화라면 그림에 대해 말하기도 발화다. 그리고 그림이 발화라면 말과 말 사이에 작가의 시각과 관점이 은연중에 혹은 공공연히 드러날 테다. 처음 안경수 작가의 작업을 보았을 때 나도 대상에 대해 얘기하고 그 대상을 어떻게 그리는지에 대해 궁금하기도 했다. 지금도 그가 그린 무엇을 보고 흘러내린 붓자국과 털어 얹은 물감의 흔적을 눈으로 쓸어 본다. 그가 붓, 분무기, 마스킹 테이프를 어떻게 쓰는지 지켜보기도 했다. 겹겹이 쌓고 지우고 또 쌓는 그 과정에서 견고한 세상의 무엇이 드러나고 감추어지는지 관조했다. 그림의 묘미라고 일컬을 피막의 겹이 이루어 낸 풍경에 감탄했다. 내가 그의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그가 그리는 대상과 그리기의 방식을 좋아한다.

그러나 나는 그의 시각과 관점이 발화하다 멈출 때 그가 취하는 이 멈춤을 문제로 삼고 생각하다 멈춤에서 시작하는 대화에 대해, 그리고 그 대화를 차츰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가 사는 방식이 멈춤과 동시에 내게 다른 태도를 보여주고, 말한다. 보여주기와 말하기를 멈출 때 그는 화가로, 나는 한 사람의 관람자로 이제 대화한다. 그는 화가로 분연해지고 나는 내 방식대로의 오해로 파편들을 펼치고 이어본다. 열릴 듯 스쳐가는 그 사이, 나는 2012년작 <낮의 나무 daytime tree>와 <밤의 나무 night tree>를 보았고 낮의 드러냄과 밤의 감춤의 대비(對比)가 오늘을 대비했다 믿게 되었다. 이 두 작품은 이번 전시를 위해 건네어 받은 두툼한 포트폴리오에서 처음 보았다. 포트폴리오의 한 페이지에 나누어 등장한 두 작품에는 낮과 밤을 입은 나무가 두 번 그려졌다. 이번 전시작들을 일별한 건 이 두 작품을 본 후다.

전시작 중 <밝은 밤 bright night>과 <공장의 노을 glow of factory>의 미묘한 찰나는 내겐 낮과 밤의 나무의 포개어짐이다. 그리고 그 포개어짐이 마음에 들지 않아 비틀어버린 그를 느낀다. 땅거미 어스름. 시간이 공간에 녹여든 상태. 시간을 공간에 녹인 상태. 그 상태가 형광등과 만나거나 주위를 밝히고 있는 인공조명과 만나 부딪힌다. 점차 밝아질지 어두워질지 시간의 경과는 알 수 없지만 그날의 대기가 빛과 만들어내는 검붉고 푸르스름한 기운이 인공조명의 빛온도와 대적가능한 하루의 일순간으로 작품에 등장했다. 낮과 밤으로 명징한 하루의 두 순간, 한 대상이 두 순간으로 쪼개어짐이 표명하는 세계가 있다. 또는 존재론적으로 유일한 대상의 대상됨을 쪼개어진 갈래를 통합함으로 제시하는 세계가 있다. 나는 그가 그동안 이 두 세계 모두에 지긋지긋해 했구나, 어쩌면 믿어 본적도 없겠구나 짐작한다. 그래서 그 사이를 열고 인공조명을 드러내거나 삽입한 장면으로 그가 살고, 작업하는 방식과 태도를 대신하고 있지는 않나 짐작한다.

<공장의 노을>을 처음 보았을 때 나도 모르게 나온 첫마디가 낭만주의적이예요 인데, 그렇게 말한 후 내가 이 작품을 놓고 생각하는 낭만주의는 무엇인가 되짚게 되었다.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나 룽에(Philipp Otto Runge)의 시각적 자취를 간취해 내기도 하지만 미술사조로서의 낭만주의로 한정하지 않고 신경의 과민함, 평형에 대한 못마땅함, 불안, 상실, 고독 등 낭만주의의 징후가 그림에 얽혀있다고 느낀 것이다. 나는 그를 낭만주의에 묶어 두진 않겠다. 건강한 현실감각, 발전적 미래나 주관적 파토스, 유토피아로의 도피가 안경수 작가의 행보는 아닌 듯하다. 그는 아마 낙관이나 비관같이 허울 좋고 거창하지만 텅빈 표지를 쫒는 대신 멀리 가지 않고 작업실 주위를 산책하는 걸 선택할거라 믿는다. <이민자의 집 Immigrants house>이나 <파워타워 power tower>, <어느 주유소의 구멍 a hole of gas station>은 작업실을 오가는 길에 있다. 사람이 살고, 사람이 살아감을 표증하는 이 그림들은 사람 없이 고운 풍경이 아니고 사회비판적 풍경도 아니다. 불가해함, 불안, 상실은 언제든 침투하지만, 살며 불평하고 의심하고 순진하게 믿어도 보고 또 믿는 자신이 못마땅한, 그의 풍경이 여기 있고 나는 여기에 어떤 근사한 말을 붙일 자신이 없다.

이번 전시에 대표 이미지로 혹시 생각하시는 게 따로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사각지대 a blind spot>를 꼽았다. 평소 같으면 그런 거 없어요 했을텐데 웬일인지 순순히 얘기했다. 지각심리학적으로는 침대 프레임처럼 보이는 이 작품은 안전 펜스로 보이는 철제 프레임이 테이프 혹은 비닐끈으로 묶여있다. 사각의 지물에 사각지대(死角地帶)라는 이름을 붙이고 녹슨 쇳가루 날리듯 그림에 물감을 찍고 흩어냈다. 그는 호크니가 인용한 ‘회화는 나이든 사람의 예술’이란 말 밖에 할 말이 없다고, 유일하게 강한 어조로 말했다. 초로의 작가처럼 구는 모습이 못마땅했지만 진심임을 안다. 사각지대는 끝내 숨겨질 곳이 아니라 특정 위치에서 보이지 않는 구역이고 관심의 영역 밖의 구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위치를 바꾸거나 관심을 갖으면 보이고, 봉인이 해제되는 지대다. 나는 <사각지대>에서 그가 그리고 또 그릴 방식을 찾는다. 영원도 순간도 아닌, 오늘의 노력과 관심으로 발굴할 세계에 대한 태도를 엿본다.

그의 작업실을 찾으며 한권 쥐어들고 간 책이 『언어의 성사: 맹세의 고고학』이다. 책 속에 ‘맹세는…그것의 진실함과 그것의 실현에 대한 보증이 관건인 것이다.’란 구절이 있었다. 나는 그 아래 공백에서부터 그와의 대화를 적어나갔다. 그가 말을 아꼈기 때문에 주로 내 단상이 적혀있다. 그곳에 어느 소설가들의 좌담에서 기억한 부분을 끄적여 놓았다. ‘질문을 완성하면 그게 소설’*인 거라고. 그림에도 적용되지 않을까. 질문을 완성하면, 그게 그림이지 않을까요.

* 이혜경, 한강, 차미령의 좌담에서 한강이 남긴 말이다. <간절하게, 근원과 운명을 향하여>, 《문학동네》, 2013년 봄호

(글: 김현주)